서정규(대전1) 원로 동문님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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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20 15:33
대전1회 서정규 원로 동문님께서 지난 5.15일 별세하셨습니다.
빈소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지하3층
발인 5.17일
아래 심창구 동창회 명예회장님께서 약업신문에 올리신 조사를 붙입니다.
[조사] 서정규(徐廷規) 대선배님의 소천을 애도합니다.
심창구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동창회 명예회장 / 서울대 명예교수>
서정규(徐廷規) 대선배님의 소천을 애도합니다.
2022년 5월 15일, 서정규 대 선배님이 만 95세를 일기로 소천하셨다.
선배님은 1927년에 서울 신당동 광희문 부근에서 탄생하시어, 1945년 경성약학전문학교(이하, 경성약전)에 입학(7회)하셨다. 경성약전은 서 선배님이 졸업하신 1948년부터 <대학령>에 의해 (사립)서울약학대학으로 이름이 바뀌어, 그해 6월 17일에 도봉섭 학장으로부터 ‘3년제 전문부 1회 졸업’이라는 약학대학 졸업증서를 받으셨다. 그후, 금강제약에 취직하셨다가 1949년 서울약학대학에 편입하여 1950년 3월 11일 박철재 서울약학대학 학장 서리로부터 4년제 약학대학을 제1회로 졸업하였다는 졸업증서를 받으셨다. 서 선배님은 (사립) 서울약학대학으로부터 전문부 졸업증서와 학부 졸업증서를 받은 유일한 인물이다. 두 졸업장은 서울대학교 약학역사관에 전시되어 있다.
서 선배님은 광희국민학교와 양정중학교를 거쳐 경성약전에 들어가셨다. 약전에서는 우익학생들의 모임인 ‘약우동지회(藥友同志會)’를 결성하였고, 그 후 학도호국단 대대장, 학생회장 등을 역임하며 좌익학생회 재건을 방지하는 등의 중요한 역할을 하셨다. 1962년 7월에 성보제약(盛保製藥)을 설립하여 대표가 되셨고, 그해 11월에 신통수(神通水)라는 제품을 ‘까스마인’으로 명의 변경하여 허가를 받았다. 까스마인은 국내 최초로 개발된 비등성액체소화제(沸騰性液体消化劑)로, 수많은 유명 제약사들의 탄산계 드링크 소화제의 효시가 되었다. 1974년에는 대한약사회 서울지부 부회장 및 서울지부의 표시가대책위원회 위원장을 겸임하여 약가(藥價) 안정에 큰 기여를 하셨다. 1982년에는 스위스 시바-가이기와 합작 설립한 한스제약의 공동대표 겸 이사회장을 하셨다.
서 선배님을 처음 뵌 것은 서울대학교 약학역사관의 개관(2015) 준비 중일 때였다. 그 후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100년사』(2016)를 집필하면서 선배님의 학창시절 이야기를 감명 깊게 듣게 되었다. 선배님은 약학대학 역사를 정리하고 있던 필자를 격려해 주시며, 본인의 두 졸업장을 기쁘게 기증해 주셨다. 선배님의 이런 저런 이야기는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100년사』에 10페이지에 걸쳐 소개되어 있다. 선배님의 졸업장은 지금 서울대 약학역사관 좋은 자리에 나란히 전시되어 있다. 약업신문사에서 발간한 『한국약업사』(홍현오 저, 1972)에도 소개되어 있지만, 선배님의 가장 드라마틱한 활약은 1945년 일본이 패망하여 우리나라가 광복된 시점에 경성약전 3대교장인 다마무시((玉虫雄藏)가 학교를 미군정(美軍政)에 팔아 넘기려 할 때였다. 서 선배님은 그 위 선배님들의 명령(?)에 따라 나무 몽둥이를 들고 교장실 입구에서 위협적인 분위기를 연출함으로써 학교를 지켜내는데 큰 공을 세우셨다. 재미있는 것은 이 의거(義擧?)의 의미를 당시에는 모르다가 2015년경 필자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 깨달으셨다는 사실이다.
작년, 그러니까 2021년 10월 22일 서 선배님을 김진웅, 주승재 교수 등과 함께 청계산 입구에 있는 한 장어구이집에서 다시 뵈었다. 필자가 한번 뵙고 싶다고 연락을 드렸더니 쾌히 승락하시고 나오셔서 점심을 사주셨다. 귀가 어두워 보청기를 끼셨고, 거동이 다소 불편하셨으나 기억력은 필자가 부끄러울 정도로 예리하셨다. 식사 후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겨 학창 시절 전후의 많은 이야기를 상세하게 해 주셨다. 일제 치하에서 클라스메이트인 일본 학생들과 갈등한 이야기 등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필자 등은 그 때 하신 말씀을 녹음하였다가 글로 정리하였는데, 그 내용은 조만간 『약학사회지(藥學史會誌) 』제5호에 사진과 함께 게재될 예정이다.
필자가 뵙기에 선배님은 우선 어려운 시기를 살아 내셨음에도 불구하고 의연하고 언행이 점잖은 멋진 신사이셨다. 분당에 있는 댁에서 인터넷 바둑을 두며 홀로 지내시는 등 사시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두번째로는 대단한 기억력의 소유자셨다. 예컨대 김기우 학장서리가 교지인 『약우(藥友) 』창간호 표지에 페니실린 구조를 학(鶴) 모양으로 디자인하셨다는 사실 등을 기억하시는 데는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세번째로 제일 놀라운 것은 선배님의 모교 사랑이었다. 역사관 개관 및 100년사 집필을 준비하는 필자를 보고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이 의미가 있다’라는 말씀을 몇 번 하셨다. 본인이 경험을 역사에 남기고 싶어 하시는 간절한 마음에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아도 한 번 뵙고 약학사회지에 실릴 인터뷰 녹취록 원고를 감수받아야지 하면서도 코로나 19사태로 인하여 차일피일 하던 중에 이렇게 선배님의 소천 소식을 들으니 마음이 슬프고 황망스러울 따름이다. 선배님의 귀가 어두우시다는 핑계로 자주 연락을 못 드린 것도 못내 송구스럽다.
그나마 이처럼 훌륭하신 선배님의 일생을『서울대약대 100년사』와 『약학사회지』에 일부나마 남길 수 있었음에 작은 위로를 느끼며, 선배님께서 천국에서 안식하시길 간절히 기도드린다.
서 선배님은 광희국민학교와 양정중학교를 거쳐 경성약전에 들어가셨다. 약전에서는 우익학생들의 모임인 ‘약우동지회(藥友同志會)’를 결성하였고, 그 후 학도호국단 대대장, 학생회장 등을 역임하며 좌익학생회 재건을 방지하는 등의 중요한 역할을 하셨다. 1962년 7월에 성보제약(盛保製藥)을 설립하여 대표가 되셨고, 그해 11월에 신통수(神通水)라는 제품을 ‘까스마인’으로 명의 변경하여 허가를 받았다. 까스마인은 국내 최초로 개발된 비등성액체소화제(沸騰性液体消化劑)로, 수많은 유명 제약사들의 탄산계 드링크 소화제의 효시가 되었다. 1974년에는 대한약사회 서울지부 부회장 및 서울지부의 표시가대책위원회 위원장을 겸임하여 약가(藥價) 안정에 큰 기여를 하셨다. 1982년에는 스위스 시바-가이기와 합작 설립한 한스제약의 공동대표 겸 이사회장을 하셨다.
서 선배님을 처음 뵌 것은 서울대학교 약학역사관의 개관(2015) 준비 중일 때였다. 그 후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100년사』(2016)를 집필하면서 선배님의 학창시절 이야기를 감명 깊게 듣게 되었다. 선배님은 약학대학 역사를 정리하고 있던 필자를 격려해 주시며, 본인의 두 졸업장을 기쁘게 기증해 주셨다. 선배님의 이런 저런 이야기는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100년사』에 10페이지에 걸쳐 소개되어 있다. 선배님의 졸업장은 지금 서울대 약학역사관 좋은 자리에 나란히 전시되어 있다. 약업신문사에서 발간한 『한국약업사』(홍현오 저, 1972)에도 소개되어 있지만, 선배님의 가장 드라마틱한 활약은 1945년 일본이 패망하여 우리나라가 광복된 시점에 경성약전 3대교장인 다마무시((玉虫雄藏)가 학교를 미군정(美軍政)에 팔아 넘기려 할 때였다. 서 선배님은 그 위 선배님들의 명령(?)에 따라 나무 몽둥이를 들고 교장실 입구에서 위협적인 분위기를 연출함으로써 학교를 지켜내는데 큰 공을 세우셨다. 재미있는 것은 이 의거(義擧?)의 의미를 당시에는 모르다가 2015년경 필자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 깨달으셨다는 사실이다.
작년, 그러니까 2021년 10월 22일 서 선배님을 김진웅, 주승재 교수 등과 함께 청계산 입구에 있는 한 장어구이집에서 다시 뵈었다. 필자가 한번 뵙고 싶다고 연락을 드렸더니 쾌히 승락하시고 나오셔서 점심을 사주셨다. 귀가 어두워 보청기를 끼셨고, 거동이 다소 불편하셨으나 기억력은 필자가 부끄러울 정도로 예리하셨다. 식사 후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겨 학창 시절 전후의 많은 이야기를 상세하게 해 주셨다. 일제 치하에서 클라스메이트인 일본 학생들과 갈등한 이야기 등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필자 등은 그 때 하신 말씀을 녹음하였다가 글로 정리하였는데, 그 내용은 조만간 『약학사회지(藥學史會誌) 』제5호에 사진과 함께 게재될 예정이다.
필자가 뵙기에 선배님은 우선 어려운 시기를 살아 내셨음에도 불구하고 의연하고 언행이 점잖은 멋진 신사이셨다. 분당에 있는 댁에서 인터넷 바둑을 두며 홀로 지내시는 등 사시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두번째로는 대단한 기억력의 소유자셨다. 예컨대 김기우 학장서리가 교지인 『약우(藥友) 』창간호 표지에 페니실린 구조를 학(鶴) 모양으로 디자인하셨다는 사실 등을 기억하시는 데는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세번째로 제일 놀라운 것은 선배님의 모교 사랑이었다. 역사관 개관 및 100년사 집필을 준비하는 필자를 보고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이 의미가 있다’라는 말씀을 몇 번 하셨다. 본인이 경험을 역사에 남기고 싶어 하시는 간절한 마음에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아도 한 번 뵙고 약학사회지에 실릴 인터뷰 녹취록 원고를 감수받아야지 하면서도 코로나 19사태로 인하여 차일피일 하던 중에 이렇게 선배님의 소천 소식을 들으니 마음이 슬프고 황망스러울 따름이다. 선배님의 귀가 어두우시다는 핑계로 자주 연락을 못 드린 것도 못내 송구스럽다.
그나마 이처럼 훌륭하신 선배님의 일생을『서울대약대 100년사』와 『약학사회지』에 일부나마 남길 수 있었음에 작은 위로를 느끼며, 선배님께서 천국에서 안식하시길 간절히 기도드린다.
선배님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2020년 5월 16일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동창회 명예회장, 서울대 명예교수 심창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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